지그 문트프로이트(SIGMUND FREUD)는 1856년 5월 6일 오스트리아의 모라비아 지방 프라이베르크 시(市) 슈로셀가세 가(街) 117번지의 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1873년에 비인대학의 의학부에 입학하여, 17세에 김나지움을 졸업할 때까지 그는 정치가가 되려했으나 유대인의 신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그당시 비인에서 유대인으로서 종사할 수 있는 가장 무난한 직업은 의사라고 판다한 그는 비인 대학에 입학하여 1881년에 우수한 성적으로 의학부 학위를 얻고 파리로 가서 그 당시 유명한 샤르코(Charcot)의 연구실에서 1년가 최면치료법을 공부하였다.

그는 일생을 통하여 1만여 페이지, 전 24권의 [프로이트전집]을 남기고 83세 (1939년)로 세상을 떠났다.

 
제 1 장 지그문트 프로이트


1.프로이트의 배경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1856년 모라비아의 프라이베르크에서 출생하여, 1939년 런던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그는 생의 대부분을 비엔나에서 보낸 비엔나 사람이었다.

1937년 나치가 오스트라아를 점령하자 프로이트는 어쩔 수 없이 영국으로 피난처를 찾아 떠나야 했다. 그에게 그런 일만 없었더라면, 그는 유아기의 첫 3년을 제외한 전생애를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에서 보냈을 것이다.

80년에 이르는 프로이트의 긴 생애는 세계 고학사상 가장 창조적인 시기 중의 하나와 일치한다. 프로이트가 세 살이 되던 1859년, 그의 가족이 비엔나로 이주한 바로 그 해에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Origin of Specides)>을 발표했다. 이 책은 전세계 사람들의 인간관계를 개혁하고도 남을 만한 운명의 책이었다.


다윈이 이전에는 인간은 영혼을 지녔으며, 그로 인해 동물계에서 분리된 독자적인 존재였다. 그러나 진화론은 인간을 자연계의 극히 미세한 일부로, 다른 동물들과 똑같은 동물로 간주해 버렸다. 이러한 일대 혁신적인 견해를 수용한다는 것은 자연주의적 노선에 따라 인간을 연구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인간을 과학적 연구의 대상이 되었고 복잡하다는 부분 외에는 다른 어떤 생명체와도 조금도 다를 바가 없게 되었다.


<종의 기원>이 발간된 다음 해, 즉 프로이트가 네 살이 되었을때, 구스타프 페흐너(Gustav Fechner)는 심리학을 자연과학의 한 분야로 정립했다. 19세기 독일의 위대한 절학자이자 과학자인 페흐너는 1860년 마침내 인간의 내면적 심리도 과학적으로 충분히 연구할 수 있으면, 양적(量的)으로도 측정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그리하여 심리학도 여타의 자연과학들 가운데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들 두 인물, 즉 다윈과 페흐너는 당시의 많은 젊은이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프로이트 역시 그들의 영향으로 지적 성장을 하였다. 때마침 19세기 후반에는 심리학과 생물학에 해한 중인(衆人)들의 관심이 왕성했다. 루이스 파스퇴르(Louis Pasteur)와 로버트 코프(Robert Koch)는 모든 질병의 원인은 세균에 있다는 이론에 입각하여 그 분야의 기초적 연구를 통해 세균학을 확립했다. 그레고르 멘델(Gregro Mendel)은 완두콩을 관찰하여 근대 유전학의 기초를 세웠다. 이러한 일련의 연구 활동은 생명과학에 대한 보다 창조적인 활동을 건개할 수 있는 개기를 마련해 주었다.


심리학 이외에 프로이트에게 보다 커다란 영향을 미친 학문은 바로 물리학이었다. 19세기 중엽, 독일의 위대할 물리학자 헤프만 폰 헬름홀즈(Hermann Von Helmholtz)는 에너지 불변의 법칙을 창안해 냈다. 이 에너지 불변의 법칙이란 사실상 에너지란 양(量)이며 그것은 질량이 양인 것과 똑같은 이치라고 설명했다. 에너지는 변형될 수는 있어도 소멸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의 체계 내부에서 어떤 부분의 에너지가 사라지면 그것은 반드시 그 체계 내부에서 어떤 부분의 에너지가 사라지면 그것은 반드시 그 체계 내부의 다른 어떤 부분에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물체가 차가워지면 상대적으로 그와 인접한 물체는 따뜻해진다는 것이다.


물리학의 체계속에서 이루어지는 에너지 변화의 연구는 역학분약에서 점차 획기적인 발전을 도모하는데 공헌했다. 에너지보존을 창안한 헬름홀츠로부터 상대성 이론을 제시한 아인슈타인에 이르기까지의 50년간은 에너지 연구의 황금기였다. 열역학, 전자학(電磁學), 방사능학, 전자학(電子學), 양자론 등 일련의 학문들이 바로 이 생동적인 반 세기 동안에 이루어진 업적이다. 하이리히 헤르츠(Heinfich Hertz), 제임스 맥스웰(James Maxwell), 조셉 톰슨 경(Joseph Thomson), 막스 플랑크(Max Planck), 마리와 피에르 퀴리(Marie and Pierre Curie), 로드 켈빈(Lord Kelvin), 제임스 줄(James Joule), 조시아 깁스(Josiah Gibbs), 드미티리 멘델레예프(Dmitrir Mendeleev), 루돌프 클라우지우스(Roudolph Clausius)와 같은 과학자들--근대 물리학의 대가 중 몇몇 이름만 나열한 것이지만--이 지금껏 베일에 가려진 에너지의 비밀을 발견함으로써 문자 그대로 세계를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


오늘날 우리의 생활을 훨씬 편하게 해 주는 노동 졸약의 도구들 대부분은 19세기 물리학의 광대한 ‘풍요의 뿔’(그리스 신화에서 어린 제우스에게 젖을 먹였다고 하는 양의 뿔)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새로이 등장한 원자력 시대가 그것을 입증해 주듯 우리는 지금까지 이 에너지 황금기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에너지와 역학의 시대는 인간에게 일상생활에 필요한 전저 제품, 텔레비전, 자동차, 비행기 등과 원자폭탄과 수소폭탄 등 무기류를 제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인간관을 인류에게 심어 준 것이다.


다윈은 인간을 동물의 일종으로 보았다. 페흐너는 인간의 마음은 과학의 영역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험실에서도 다루어질 수 잇고 정호가하게 측정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그러나 신(新)물리학은 보다 더 진보적인 인간관을 가능하게 했다. 그것은 인간이란 하나의 에너지 체계이며, 따라서 인가도 역시 비누방울과 행성의 운행을 지배한는 동일한 물리적 법칙에 순종해야 한다는 인간관이다.


19세기의 후반 4반세기 동안, 생물학 연구에 심혈을 기울인 젊은 과학자로서의 프로이트는 이와 같은 신(新)물리학의 영향을 필연적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에너지와 역학으느 모든 실험실 속으로 침투하여 과학자들의 정신 속에 스며들었다. 프로이트가 의학도로서 에른스트 브뤼케(Ernst Bruke)의 영향 아래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은 크나큰 행운이었다. 브뤼케는 비엔나대학 ‘생리학 연구소’의 소장이었고, 당시 최고의 생리학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의 저서 <생리학 강의(Lectutes on Physiology)> 는 1874년 프로이트가 의과대학에 입학한 이듬해에 발간되어 진보적인 사상, 즉 어떠한 유기체도 화학과 물리학의 밥칙을 적용할 수 있는 역학적 체계라는 사상을 확립시켰다. 프로이트는 스승 브뤼케를 매우 존경했고 이 혁신적인 역학전 생리학에 깊이 심취했다.


향후 20년, 프로이트는 스스로의 독창적인 천재성에 힘입어, 이 역학의 법칙은 인간의 신체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기본적 성격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른바 역학적 심리학이란, 인성에 내재한 에너지의 변형과 교류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이것은 프로이트가 이룩한 가장 커다란 업적이며, 또한 근대 과학이 이룩한 가장 위대한 업적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프로이트로 하여금 심리학의 역사를 뒤바꾸도록 한 결정적인 대사건이었따는 것이다.

 

2.프로이트이 역학적 심리학

 

프로이트는 1881년 비엔나 대학에서 의학 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개업의가 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어려서부터 그는 의사가 되기볻는 과학자가 되기를 갈망했다. 이러한 목표를 지닌 그는 비엔나 17세가 되던 해인 1873년 대학에 입학했고, 1876년 최초의 독자적인 연구에 몰두하게 되었따. 그는 이 초기의 연구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뱀장어의 고환을 찾아내고자 했으며, 결국 그것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그 후, 약 15년간 프로이트는 신경계의 연구에 전념했따. 그러나 이러한 과학전 연구의 대가로 받는 수입만으로는 아내와 여섯 자녀들, 그리고 주위의 친척들을 부양하기 어려웠으므로 연구에만 전력 투구할 수가 없었다. 더욱이 그 당시 비엔나에 만연했던 반유태주의 운동 때문에 대학에서 승진하는 데도 적지않는 지장이 있었다. 결국 그는 자신이 원했던 것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스승 브뤼케의 충고에 따라 병원을 개업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개업을 하여 바쁜 중에도 시간을 내어 틈틈이 신경학 연구에 임했고, 점차 장래가 총망한 젊은 과학자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어떤 면에서는 프로이트가 병원을 개업한 것이 매우 다행한 일이기도 했다. 만약 그가 위학 교수로서 학교에 아주해 있었더라면 그는 결코 역학적 심리학이라는 위대한 업적(?)을 창안해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환자와의 잦은 접촉이 그로 하여금 심리학적 관점에서 모든 사고를 전개하도록 자극했던 것이다. 그의 일반적 배경을 고려해 봄에 있어서 프로이트가 개업의로서 일을 시작하여 인간의 신경에 관한 질병을 전문적으로 다루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여겨진다.


그 무렵 이 분야의 의학은 매우 낙후된 상태였다. 정신적으로 괴로워하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 제대로 해줄 수 있는 일이 그리 많지 않았다. 프랑스의 장 샤르코(Jean Charcot)는 최면술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고, 특히 그는 히스테리의 한 치료에 효과를 보고 있었다. 프로이트는 샤르코의 히스테리 치료법을 배우기 위해 1년간(1885-1886)파리에 머문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샤르코의 최면술에 만족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최면술에 의한 치료의 효가는 단지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고 근본적으로 질병을 치유할 수 없음을 깨달았지 때문이었따. 또한 비엔나의 조셉 브로이어(Joseph Breuer)의사로부터 정화(淨化)치료법, 즉 ‘당신에게 있는 모든 문제점을 이야기 하시오’라는 방식의 치료법이 훨씬 효과가 있음을 배웠다. 의사가 주의 깊게 환자의 얘기를 듣는 동안 호나자는 자신의 문제점을 스스로 얘기하는 것이다.


몇년 뒤에 프로이트는 개선되고 보다 진보된 정신병의 치료법을 개발했지만, ‘모든 문제점을 이야기 하시오’라는 식의 자유연상법(自由聯想法)을 이용해 비정상적인 행동의 잠재적 원인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데 커다란 도움을 받았다. 과학에 대한 성실한 태도와 정열을 지닌 그는 자신의 호나자들의 내심(내면)을 점차 깊이 탐색해 나갔다. 그런 연구를 거듭한 결과 인식의 마음속에 어떤 역학적인 힘이 작용하고 있음을 밝혀냈다. 그 힘이 바로 치료를 필요로 하는 비정상적인 증세를 유발하고 있음을 알안냈던 것이다. 프로이트의 생각은 점차 이러한 힘의 대부분이 무의식적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깨달았고 그 방향으로 굳혀져 갔다.


이것이 프로이트의 과학자적 생애에 일대 전환점을 가져왔다. 그는 잠시 생리학과 신경학을 뒤로 제쳐놓고 심리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환자를 치료하는 방이 곧 그의 실험실이 되었고, 안락의자가 유일한 실험기자재가 되었으며, 환자드 두서없이 지껄이는 말이 과학적 자료가 되었다. 이것에 덧붙여 프로이트이 성실한 탐구 정신이 역학적 심리학을 창안하게 한 모든 기본적 요소들로서 갖추어지게 하였다.


1890년대에 이르자 프로이트는 자신의 철저한 성격과 더불어 집중적으로 자아 분석을 시작했다. 그것은 그의 환자들이 제공한 자료를 보다 확실하게 파악하기 위해 프로이트 자신의 무의식을 심층적으로 분석하는 작업이었다. 자신의 꿈을 분석하고 자신의 머리 속에 떠다니는 온갖 사념들을 철저히 밝혀 보임으로써, 그는 자신의 내면 세계에 작용하고 있는 역학의 힘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자기 자신과 환자들로부터 얻은 일련의 깨달음을 통해 인성 이론의 기초를 세우기 시작했다. 그 후, 그는 전생애를 인성이론을 발전시키는 일에 모든 창조적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후에 그는 이렇게 토로했다.


“나의 전생애는 오직 단 하나의 목표만을 추구해 왔습니다. 즉 정신의 기구(機構)는 어떻게 구성되며 또 그 기구 속에서 상호 작요하고 갈등을 일으키는 힘은 어떤 것인지를 추론하는 일이었습니다.”


<꿈의 해석(The Interpretation of Dreams)>은 1890년대에 완성한 것이었으나 19세기가 다 가는 날까지도 발간되지 못했고 1900년에 와서야 마침내 출판 일자가 정해졌다. 그것은 신세기의 상서로운 시작이었따. 오늘날 이 책은 현대가 낳은 위대한 저작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것으로서 단순히 꿈을 다룬 것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내면에 작용하고 있는 역학을 다루고 있으며, 특히 제 5장은 프로이트가 인간의 정신을 분석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책이 처음 발간되었을 때, 비전문가들은 거의 읽은 사람이 없었고, 의학계와 과학계에서는 일시에 무시해 버렸다. 초판 600부가 팔리는 데 무려 8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꿈의 해석>이 세인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 실패작이 되었다고 해서 낙담하지는 않았다. 그는 스스로 올바른 길을 가고 있다고 확신했으며 정신 분석학적인 측면으로 인간의 내면을 끊임없이 탐구해 나갔다. 그는 호나자들이 고질적인 병을 이겨내는 데 도움을 주었고, 동시에 환자들은 그가 무의식에 대한 지식을 넓히는 데 도움을 주었다.


<꿈을 해석>에 대한 보잘것없는 반등에도 불구하고 프로이트는 향후 10년간 끊임없이 많은 채과 논문들을 발표했다. 1904년 프로이트는 <일상 생활의 정신 병리학(The Psychopathology of Everyday Life)>을 발표했는데, 이 책은 실언(失言), 실수, 사고 그릇된 기억들은 모두 무의식적인 동기에 기인한다는 새로운 주장을 담고 있다. 1905년 그는 더욱 중요한 세 권의 책을 발표했다. 그 가운데 나나가 <히스테리 증세의 연구 (A Case of Hysteria)>로, 여기서 프로이트는 정신지롼의 심리학적 요인을 추적하는 방법을 상세히 기술하였다.


또한, <성욕의 세 논문(There Essaus on Sexuality)>은 인간의 성적 본능의 발달을 볼수 있는 프로이트 자신의 관점을 밝히고 있다. 몇몇 심리학 권위자들은 이 논문들 중에서 <꿈의 해석>을 제외한다면 프로이트의 저작 중 가장 괄목할 만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평가에서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간에--필자는 동의하지 않는다.--프로이트는 이 세 논문으로 인해 범성론자(汎性論者)라는 부당한 평가를 받게 되었다. 세번째 책인 <위트와 무의식의 관계(Wit and Its Relation to the Unconscious)>는, 사람들이 주고 받는 농담이 무의식의 메커니즘이라는 사실을 증명해 준다.


오랫동안 과학계와 의학계로부터 고립되어 지내온 프로이트는 독자적으로 일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의 일련의 저서를 통해, 그리고 신경증 환자를 치료하는 정신 분석적 방법이 점차 실효를 거둠에 따라 몇몇 사람들이 그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들 가운데는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과 알프레드 아들러(Alfred Adler)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두 인물은 후에 이 전의 정신 분석학을 지지다헌 태도를 버리고 서로 대립적인 학파를 형성했다. 그러나 그들은 제 1차 세계대전이 이러나기 전 몇년 동안 프로이트의 학설을 따랐고, 정신 분석학을 국제적인 학문으로 확립한느 일에 조력했다.


1909년 프로이트는 마치냄 학문적이 인정을 받게 되었다. 매사추세츠 주의 우스터에 있는 클라크 대학 개교 20주년 기념식의 연사로 초청을 받았던 것이다. 클라크 대학의 총잔 스탠리 홀(Stanley Hall)은 구 자신 또한 저명한 심리학자였으며, 심리학에 기여한 프로이트의 업적이 매우 컸음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프로이트의 견해를 미국 전역에 널리 보급하고자 애썼으며, 실제 그의 노력에 힘입어 프로이트의 이론은 점차 미국내에 크게 보급되었다.


날이 갈수록 프로이트의 명성은 도처에 만연되었고,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그이 이름은 전세계의 수백만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정신 분석한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모아 생활의 구석구석까지 그 영향이 미쳤다. 종교, 예술, 문학, 사회적 관습, 윤리, 도덕, 교육, 사회가학 등 전분양에 걸쳐 프로이트 심리학의 영향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정신 분적을 받고 잠재 의식, 억압된 충동, 금지, 열등감, 고착 등의 용어들을 일상적인 전분야에 걸쳐 대화에 사용하는 것이 유행했다. 이와 같이 프로이트의 정신 분석하이 대중의 흥미를 끈 것은 그것이 성(性)과 관련된 학문이라는 점에 있다.


프로이트는 전생애에 있어서 계속적으로 저술 활동을 펼쳐왔다. 한 해에 최소한 한두 권의 주요한 책이나 한두 편의 중요한 논문을 발표하는 일 없이 그냥 지나가는 해가 거의 없었다. 현재까지 영어 보급판으로 나오고 있는 그이 저서들을 다 모은다면 24권에 달할 것이다. 프로이트 산문의 대가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그는 과학적 저술가 사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유리한 명문의 대가였다. 독자를 지나치게 의식하지 않으면서도 역동감과 흥미를 일으키는 우ㅠ려한 문체를 구사하여 자신의 생각을 독자들에게 충분히 피력하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자신의 연구가 결코 완벽하게 완성되었다고 생각 한 적이 없었다. 환자들이나 동료들로부터 새로운 증거가 제기되면 자신이 인식하고 있던 기본적인 이론을 확장하거나 수정해 나갔다. 예를 들면 1920년, 그이 나이 이미 70세였지만 자신의 기본적인 견해를 대거 변경했던 것이다. 그는 동기 이론(theory of motivation)을 개정했으며 불안 이론(theory of anxiety)을 완전히 취소했다. 그리고 이드(id)와 자아(ego)와 초자아(super-ego)를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인성의 모델을 설립했다. 어떤 학자라도 70세란 고령에 그 정도의 신축성을 기대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어쩌면 변화를 거부하는 것이 그 나이의 특징일 것이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평범한 척도에 의해 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그는 일찍이 과학적 확고부동성이란 지적 우매성(愚昧性)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3. 프로이트는 누구인가?

 

프로이트는 누구인가? 그이 직업은의사였고, 자신이 창안해내 독특한 방법으로 정신질환자들을 치료하였다. 오늘날이라면 그를 정신과 의사라고 부를 것이다. 흔히 정신 의학이란 정신병과 정신 이상을 다루는 의학의 한 분야라고 간주한다. 프로이트는 현대 전신 의학이 설립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병원을 개업했지만 스스로 원해서의 의사가된 것은 아니었다. 1927년 그는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41년이란 오랜 세월 동안의 의사 생활을 돌이켜보니, 나 자신 엄격히 말하자면 결코 진정한의가사 아니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난 내 자신이 지녔던 원래의 목적에서 벗아나 어쩔 수 없이 의사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의 원래의 목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몇 가지 자연의 수수껚;ㅔ를 이해하고 그 해답을 찾는 데 기여하는 것이었다. 이 목적을 달성하는 데 있어 가장 바람직한 길은 의학교수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당시에 나는 동물학 실험과 화학시험--비록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지만--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나의 전생애를 통해 누구보다도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스승 브뤼케의 영향을 받아 생리학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그 물렵의 생리학도 조직학의 일부분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가 원한 바 그대로 본다면 프로이트는 분명 과학자였다. 젊은 의학도로서, 그리고 구 후 여러 병원에 관계하면서, 그는 생리학적 현상을 연구하였다. 신중한 관찰에 의해 완벽한 자료를 수집하는 법, 자신이 발견한 사실들을 상호 연관시켜 결론을 도출(挑出)하는 법, 그리고 계속적인 관찰을 통해 자신의 초론을 확인하는 법 등을 배웠다. 생리학자로서의 그는 그렇게 뛰어난 업적은 남기지 못했지만, 실험실에서의 초기의 경험을 통해 프로이트는 과학적 연구 방법에 대한 뛰어난 훈련을 쌓았다. 그 경험은 그를 과학자가 되는 길로 인도했던 것이다.


1890년대에 이르러 프로이트는 자신이 어떤 종류의 과학자가 되고다 하는지를 깨달았다. 그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저기 멀리서 나를 손짓해 부르는 목표는 바로 심리학이오.’ 그리하여 프로이트는 그 후 40년을 심리학자로서 살아왔다.


심리학과 정신 분석학은 어떤 연계성이 있는가? 1927년 프로이트는 자신의 이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정신 분석한은 심리학의 범주 안에 속한다. 그것은 케케묵은 의학적 심리학이나 병적인 중세를 다루는 심리학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단순히 심리학 그 자체에 있는 것이다. 결코 정신 분석한이 심리학의 전부는 아니다. 그러나 그서은 분명 심리학의 하부 구조이며 어쩌면 심리학의 전체적인 토대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여기서 프로이트는 정신 분석을 인성 이론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정신 분석에는 또 다른 일면이 있다. 정신 분석은 정신질환의 한 방법이기도 한 것이다. 그것은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사람들을 치료하는 기술로 구성되어 있다. 프로이트에 있어서 정신 분석의 치료적인 면은 과학적이고 이론적인 두 가지 측면에 비하면 2차적인 것이었다. 그는 결코 이 치료법이 과학을 능가하는 것을 바라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이 입문서에서처럼 심리학의 이론 체계로서의 프로이트 심리학과 정신 치료법으로서의 정신 분석을 구별하는 것이 현명하리라고 생각된다.


프로이트는 내과 의사, 정신과 의사, 과학자, 심리학--이러한 인물 전부였다. 그러나 그는 그 이상의 인물이었으니, 그는 곧 철학자였던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1896년 그가 친구에게 띄운 편지 속에서 엿볼 수 있다. “젊었을 떄 나는 철학적 지식 외에는 아무것도 갈망한 것이 없었소. 그리고 이제 의학에서 심리학으로 전향한 나는 이 욕구를 채우고 있는 중이라고.” 19세기의 과학자들에게 있어서는 철학에 매료되는 것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사실상 많은 과학자들에게는 과학이 곧 철학이었다. 철학이란 바로 ‘지식을 사랑하는 것’--애지(愛知)--을 의하는 것이 아닌가? 과학자가 되는 것보다 더 지식을 사랑하는 태도를 잘 보일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이것이 바로 괴테가 독일의 모든 지성인들에게 강조하고 있는 과학의 본질에 대한 요점이었다. 괴테는 19세기의 사상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고 독일의 우상이었다. 프로이트 역시 괴테의 영향권을 피하지 못했다. 사실상 그는 자연에 대해 연설하는 괴테의 대중 강연회를 통해 그의 고무적인 논문이 낭독되는 것을 듣고 난 뒤, 스스로 과학자가 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프로이트의 철학적 관심은 전문적이거나 학문적인 철학자의 관심과 동일한 것은 아니었다. 그이 철학은 사회적이고 인도주의 적이었다. 그것은 생활 철학을 세우는 형태였다. 독일인들은 이러한 생활 철학을 표현하는 특수한 용어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세계관’의 의미하는 ‘Weltanschauung'이란 단어이다. 프로이트는 종교나 형이상학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고 가학에 근거한 생활 철학을 대표하고 있다. 즉 가치 있는 생활 철학이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진정한 지식, 다시 말해 과학적 연구와 계속적인 탐구에 의해서만 얻을 수 있는 지식에 바타을 둔 것이어야 한다고 믿어왔다.


프로이트는 정신 분석이 어떤 새로운 세계관을 형성.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만 정신 분석은 과학적 세계관을 인간의 연구 분야로 확대하는 것으로 족했다. 프로이트가 지닌 독자적인 새오할 철학은 ‘과학을 통한 지식’이라는 한 구절로 요약될 수 있다.


인성(人性)에 대한 깊은 지식은 프로이트를 비판적이고 비관적으로 만들었다. 그는 인류라는 거대한 집단을 그리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인간의 본성에는 비합리적인 부분이 너무 많기 때문에 합리적인 부분의 힘이 비합리적인 것의 힘에 대향하여 성공할 기회가 거의 없다고 생가했다. 극소수에 불과한 사람들만 이 이성이 안내하는 생활을 꾸려갈 수 있을 뿐,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실보다는 환상과 미신을 좇는 생활을 더 편안하게 여기며 살아가고 있다. 프로이트는 자신들의 환상을 강하게 고집하는 환자들을 너무 많이 봐아 왔다. 그들은 논리와 이성에 기끌리면서도 환상 쪽에 보다 큰 믿음을 간직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인간은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견해는 그이 많은 저술을 통해 종종 나타나는 것이지만, 특히 <환상의 미래(The Future of on Illusion)>에서 가장 명확하게 나타나고 있다.


프로이트는 또한 사회 비평가다. 그는 인간으로 형성된 사회란 대체로 그 인간의 비합리성을 반영한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새로운 세대는 모두 비합리적인 사회 속에 태어남으로써 은연중 타락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 그리고 사회가 인간에게 끼치는 영향, 이런한 악순환 속에서 오직 불굴의 의지를 가진 소수의 사람들만이 이 악손환에섭 서어날 수 있을뿐이다.


프로이트는 자녀의 양육 및 교육에 심리학 원리를 적용하면 이러한 상황이 조금은 개선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 것은 부모와 교사가 이성과 진리를 효과적으로 대행하기 위해서는 심리학에 입각한 교육을 다시 받아야 한다는 거을 전제로 하고있다. 프로이트는 이 과제가 엄청난 일이라는 사실을 과소평가하지는 않았지만 보다 나은 인간과 보다 나은 사회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별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프로이트의 사회비평은 <문명과 문명에 대한 불만(Civilization and Its Discontents)>이라는 그의 저서 속에 잘 그려져 있다. 그렇다면 프로이트는 과연 어떤 인물인가? 내과 의사, 정신과 의사, 심리학자, 정신분석학자, 철학자, 그리고 사회 비평가--이러한 역할이 그가 지닌 재능이었다. 그러나 그의 재능들을 따로 떼어서 보든, 또는 함께 합쳐서 보든, 이것들로써 프로이트의 전부를 효과적으로 다 전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천재’라고 말한 무분별한 찬사는 숱한 사람들에게도 주어지는 것이지만, 바로 이 ‘천재’라는 단어 외에 프로이트를 달리 표현할 적절한 단어가 없다. 그는 말 그대로 ‘천재’였다. 사람들은 나와 마찬가지로 프로이트를 역사상 보편적인 정신을 소유한 두문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인정할 것이다. 세익스피어, 괴테, 레오나르도 다 빈치처럼 프로이트도 분명 어떤 것이든지 손만 댔다 하면 그것을 명백하게 밝혀내는 인물이었다. 그는 분명 세기적인 인물이었던 것이다.

 

 

제 2 장 인성(人性)의 조직

 

프로이트는 인성(Personality)은 세 가지 주요 체계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 체계가 소위 말하는 ‘이드(id)’와 ‘자아(ego)’와 ‘초자아(superego)’이다.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이들 세 체계가 통일되어 조화로운 조직을 형성한다. 이 체계들은 상호 협력하고 작용함으로써 개인이 효율적이며 만족스럽게 환경에 대처할 수 있도록 한다. 이러한 황견에 대처하는 것은 이간의 기본적 욕구와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이다. 반대로 이들 인선의 세 체계가 서로 어긋나면 개인은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다는 말은 듣게 된다. 그는 자기 잔신과 세상에 불만을 품고 능력이 저하되는 것이다.

 

1. 이 드(id)

 

‘이드(id)’의 유일한 기능은 내적 또는 외적 자극에 의해 유기체 내부에서 발생되는 흥분 에너지 또는 긴장의 양을 그대로 외부로 배출한다. 이런한 이드의 기능은 원시적 또는 추보적인 생활의 원리를 만족시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이 원리를 ‘쾌락 원리(pleasure principle)’라고 불렀다. 이 쾌락 원리의 목적은 긴장으로부터 벗어나는 데 있다. 만약 그석이 불가능하다면--보통의 경우 불가능하다--긴장의 양을 조금씩 저하시키고 될 수 있는 대로 낮은 긴장 상태를 장시간 지속하려는 것이다. 긴장은 불쾌감과 고통을 가져오고, 반면 긴장의 해소는 만족과 쾌락을 가져온다. 그러므로 코랙 원리의 목적은 고통을 피해 쾌락을 찾는 데 있다.


모든 유기체 속에는 내.외적 변화가 닥칠 때 불변성을 유지 하려는 보편적 성향이 있따. 쾌락 원리는 이 보편적 성향을 말해주는 하나의 특수한 예에 불과하다.


이드의 최초 형태는 ‘반사(reflex)’장치이다. 그것은 어떤 감각적인 자극이 전해 왔을 때 운동 신경계를 통해 그 자극을 직접 방출한다. 따라서 지나치게 밝은 광선이 눈의 망막에 비쳐지면 눈꺼풀을 덮어서 그 광선이 망막에 이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광선이 신경계에 유발시킨 흥분은 진정되고 생명체는 편안한 상태로 되돌아 간다. 생명체는 이러한 반사 기구를 많이 가지고 있는데. 이들 기구는 자극이 어떤 신체적 에너지를 발생기킬 때, 이들 기구는 자극이 어떤 신체적 에너지를 발생싱킬 때, 그 에너지를 자율적으로 방출하기 위해 감각기관에 작용한다. 일허게 운동 신경이 직접 에너지를 방출함으로써 전반적인 자극의 제거를 가져올 수 있다. 예를 들어 재채기는 보통 코의 감각선을 성가시게 하는 물질을 제거하는 운동이고, 또 눈물이 흐르는 것은 눈 속의 이물질은 제거하는 운동인 것이다. 이러한 자극은 신체의 내부에서 올 수도 있고 또한 외부로부터 올 수도 있다. 여기서 내부에서 오는 자극의 한 예를 들어 보기로 하자.


방광에 가해지는 압력이 어느 수준에 도달하면 방관의 판막은 반사작용으로 열리게 된다. 이렇게 열린 판막을 통해 방광의 내용물을 배출함으로써 그 압력이 유발시킨 흥분(긴장)은 제거된다.


만약 모든 생명체에 발생하는 긴장들이 반사작용만으로 해소될 수도 있따면 이 원시적인 반사 장치를 능가하는 심리적 발달은 하등 필요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3다. 때로는 적절한 반사적 해소를 할 수 없는 긴장도 많다. 예컨대 유아의 위(胃)가 배고픔으로 인해 위축 운동을 할 때, 이 위축 운동은 자율적으로 음식을 만들어 공급해 주지는 못한다. 그 대신 불안감을 유발하고 울음을 터뜨리게 한다. 그 유아에게 음식을 주지 않음은 위축 운동은 강도를 더해 결국 아이는 지쳐서 쓰러질 때에야 울음을 그치게 된다. 유아는 경국 아사(餓死)하고 만다.


배고픈 유아는, 그 허기를 달래줄 수 있는 음식물을 먹여 주지 않는다면 죽게 될 것이다. 유아에게 적당량의 음식물을 주면 유아는 빨고 삼키고 소화하는 작용이 다른 도움 없이 수행되고 배고픔으로 인한 긴장은 사라진다.


만일 유아가 배고픔의 긴장을 느낄 때마다 곧 음식물이 주어진다면, 그리고 신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흥분이 부모의 보살핌과 선천적인 반사작용의 도움으로 해소된다면 심리적 발달은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부모가 세심한 배려를 한다 해도 유아의 욕구를 미리 알아차리고 그것을 만족시키기는 힘들 일이다. 오히려 계획된 시간표에 따라 훈련과 단련을 시킴으로 해서 부모는 긴장을 감소시키면서 또한 새로운 긴장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로 인해 유아는 좌절과 욕구 불만을 동시에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경험이 이드이 발달을 자극하는 것이다.


욕구불만의 결과로서 이드에 발생하는 새로운 발달을 ‘제1차 과정(primary process)’이라고 한다. 제1차 과정의 본질은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의 내적 잠재력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내적 기구는 감각 신경과 운동 신경을 가지고 있따. 감각 신경은 자극을 수옹하기 위해 특수한 구조를 발달시킨 감각기관들로 구성된다. 운동 신경은 행동과 운동을 수행하는 기관으로 근육으로 형성된다. 반자작용에는 근육 감각 기관 그리고 감각 기관에서 수용한 작극을 운동기관으로 전달하는 신경기관만 있으면 된다.


인간은 감각계와 운동계 외에 지각계(知覺系)와 기억계(記憶系)도 가지고 있따. 지각계는 감각 기관으로 흥분을 수용하여 심상(心象)을 형성하거나 감각계에 나타난 대상을 재현한다. 이러한 심상들은 기억해 속에 기억으로 보존된다. 기억이 활성화되면 인간은 최초에 지각했던 그 대상에 대해 기억하고 있다는 말을 한다. 이 기억에 의해 과거는 현재로 이어진다. 지각이 어떤 대상에 대한 심적 재현이라면, 기억은 지각에 대한 심적 재현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세상의 어떤 것을 볼 때, 그때 지각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일단 우리가 보았던 것을 돌이킬 때 기억이 이루어진다.


이제 배고픈 유아의 경우로 되돌아가자. 과거에 그 유아는 배가 고플 때마다 결국 음식을 먹게 되었다. 음식을 먹는 동안 유아는 음식을 보고 맛을 알고 냄새를 맡으며 포만감을 느낀다. 그리고 이러한 지각들은 유아의 기억계 속에 저장된다. 이런 일이 반복됨에 따라 음식은 긴장을 감소시키는 역할과 결부된다. 따라서 배고플 때 유아에게 그 즉시 음식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배고픔의 긴장은 그와 결부된 음식을 기억 속에 떠올리게 된다. 이와 같이 이드 속에는 배고픔으로 인한 긴장을 해소시킬 수 있는 대상, 즉 음식에 대한 심상(心象)이 강하게 자리잡게 된다. 긴장을 완화시키기 위해 어떤 대상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는 과정이 바로 ‘제1차 과정’이다.


이른바 제1차 과정이란 프로이트가 말하는 <지각의 동일성(identity of perception)>을 수집함으로써 긴장을 완화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프로이트가 지적한 이 ‘지각의 동일성’이란, 이드가 지각 그 자체와 기억 심상을 동일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이드에게 음식물을 기억하는 일이 곧 어떤 음식을 먹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즉 이드는 실재하는 대상에 대한 ‘객관적’인 지각과 ‘주관적’인 기억 심상을 구별하지 못한다. 흔항 예로, 목마른 나그네가 물을 보는 상상을 하는 것이 바로 이 제1차 과정이 작용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제1차 과정이 만들어내는 또다른 예로서 꿈을 들 수 있다. 꿈은 보통 가시적(可視的)인 특성을 지닌 상상이 연속적으로 나타나는 것인데, 그것은 과거의 사건이나 대상을 기억 속에 떠올림으러써 긴장을 감소시키는 역할을 한다. 물론 예의 사건이나 대상은 마족과 결부된 것들이다. 배가 고픈 상태로 잠든 사람은 먹는 것과 관련된 일이나 음식물에 대한 꿈을 꾸게 되고, 성욕을 느끼며 잠자는 사람은 성행위나 그와 연관된 꿈을 꾼다. 긴장을 완화시키는 대상에 대해 어떤 상상을 형성하는 것을 소위 ‘소망 실현(wich-fulfillment)’이라고 한다. 여기서 프로이트는 꿈이란 대부분 수망 실현이거나, 또는 소망실현을 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즉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바를 꿈꾸게 된다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배고픈 사람이 음식물에 대한 상상을 한다고 해서 식사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또한 목마른 사람이 물을 마시는 상상을 한다고 해서 갈증이 해소되는 것도 아니다. 글러므로 꿈을 꾸는 사람이 소망하는 대상이나 어떤 사건에 대한 꿈을 꾸는 목적은 잠을 깨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것이라고 프로이트는 믿어 왔다. 깨어 잇을 때에도 제1차 과정은 쓸모가 있는 것이다. 우선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하기 전에 그 원하는 것이 무엇이지부터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즉 원하는 것에 대한 심상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배고픈 사람이 음식물을 마음 속에 재현할 수 있다면 무엇을 구하는지 모르는 사람보다 쉽게 허기를 채울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제1차 과정이 없다면, 사람들은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갈팡질팡하며 시행착오를 거듭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제1차 과정만 으로는 효과적으로 긴장 완화를 이룰 수 가 없으므로 ‘제2차 과정(secondary process)’이 전개되는 것이다. 이러한 제2차 과정은 자아(自我)에 속한다. 거기에 대한 논의는 다음의 자아 편(篇)에서 다루기로 하자.


프로이트는 이드에 대해 또 다른 의미가 있음을 말했다. 이드는 심리적 에너지의 1차적인 원천이며, 본능이 자리잡고 있는 곳이다.


이드는 외부 세계보다 신체 및 신체의 작용에 보다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이드는 자아나 초자아와 비교해 볼 때 별다른 조직을 갖고 있지 않다. 이드의 에너지는 운동 상테에 있기때문에 쉽게 방출될 수 있으며, 하나의 대상에서 다른 대상으로 쉽게 전이될 수 있다. 이드는 시간이 흐름에 빠라 변화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경혐에 의해 수정될 수도 없으며, 외부적인 것과 연관을 갖고 있지도 않다. 그러나 확실히 자아에 의해 지배되고 규제될 수 있다.


이드는 논리나 이성, 그 어떤 것에도 지배받지 않는다. 또한 이드는 가치라든가 도덕, 윤리 따위를 지니고 있지도 않다. 이드는 다만 쾌락 윈리에 따라 본능적 욕구를 만족시키려는 하나의 일념만을 갖고 움직인다. 이드의 작용에는 단 두 개의 출구가 있을 뿐이다. 이드는 자아의 영향에 복종하거나 아니면 행동 또는 소망 실현을 통해 표출되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자아의 영향에 복종하는 경우에는 그 에너지가 곧바로 방출되지도 않고 ‘묶여’있게 된다.


프로이트는 이드야말로 진정한 인간의 심리적 실체라고 말한다. 이 말은 이드가 원초적인 주체이며, 개인의 외부 세계를 경험하기 이전부터 존재하는 내면 그 자체라는 것이다. 본능과 반사작용뿐만 아니라, 긴장 상태가 만들어내는 심상(心象) 역시 타고난 것일지도 모른다. 이것은 배고픈 유아가 음식물을 결부시키는 것을 외부로부터 배우지 않고도 음식물에 대한 심상을 가질 수 있다는 뜻이다. 프로이트는 매우 빈번하게, 강하게 반복되는 개인의 경험들은 세대가 이어짐에 따라 이드 속에 영원히 각인되어진다고 믿었다. 이처럼 새롭게 획득되는 소질은 한 개인의 생애 동한 ‘억압(repression)’의 영향아래에서 초래되는 결과로서 이드 속에 형성되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이드를 관찰해 볼 때나 개인의 일생에 있어서도 그것은 역시 원초적이다. 이드는 인성이 형성되는 주춧돌이다. 이드는 일생을 통해 갓난아이와 같은 특성을 꾸준히 유지한다. 이드는 긴장을 참지 못하며, 무엇이든지 즉시 만족을 요구한다. 이드는 매우 충동적이며 비합리적이면 반사회적이며 또한 이기적이고 쾌락을 사랑한다. 이드는 이성에 있어서 버릇없는 개구쟁이인 것이다. 이드는 위대한 힘을 지닌 전지전능한 존재다. 그것은 ㅅ아상, 환상, 공상, 꿈 등에 의해 소망을 실현하는 마력(魔力)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드는 자신의 외부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이드는 주관적 실제의 세계에서 고통을 피해 쾌락을 추구하는 것만이 유일한 기능이다.


프로이트는 이드가 인성의 조직체로서 애매하고 접근하기 어려운 부분이며, 그것에 대해 아주 부분적인 것이라도 알게 된 것은 꿈의 연구와 신경증 증세의 연구를 통해 배운 것뿐이라고 솔직히 시인한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어떤 일을 충동적으로 행할때면, 그 행동에서 즉각 이드이 존재를 알수 있다. 예컨대 창문에 돌을 더니고 샆다거나, 남의 발을 걸어 넘어뜨리고 싶다거나, 강탈하고 싶다는 순간적 충동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은 이드이 지배를 강하게 받고 있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백일몽을 꾸며 사상누가(砂上樓閣)을 짓는 데 많은 시간을 허비하는 사람 역시 이드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든 결코 사고(思考)하지 않는다. 다만 소망하고 행동할 뿐이다.

 

2. 자 아 (EGO)

 

이드(ID)는 긴장을 해소하는 두 가지 과정, 즉 충동적인 운동계의 활동과 심상의 구성(소망 실현)만으로는 생존과 종족 보존이라는 거대한 지화론적 목표를 완벽하게 달성할 수 없다. 반사 작용이나 소망이 아사 직전의 인간에게 음식물을 공급하지 못하며, 성욕이 일어난 인간에게 상대를 제공하지는 못할 것이다. 사실상 충동적인 행돈은 다를 세계로부터 처벌을 야기시킴으로써 오히려 긴장(고통)을 배가시키는 결과만을 가져올 수도 있다. 유아기 때와 같이 항상 곁에서 돌보아 주는 사람이 잇을 수 없다면, 음식물과 성(性)의 상대와 그 외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다른 많은 것들을 자신이 직접 구하고 찾아야만 한다. 이러한 것들을 성공적으로 얻기 위해서는 외부의 환경을 고려해야만 한다. 그리하여 환경에 순응하거나 아니면 환경을 지배함으로써 스스로 필요로 하는 것을 얻어야 할 것이다. 인간과 세상과의 이러한 상호 교류는 새로운 심리 체계, 즉 ‘자아(ego)’를 필요로한다.


잘 적응한 사람의 경우, 자아는 인성의 집행자가 되어 이드와 초자아를 통제하고 지배하며, 인성 전체와 그의 광범한 욕구를 위해 외부 세계와의 관계를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 자아가 이러한 집행 기능을 현명하게 수행하면 조화와 적응이 두드러지게 될 것이다. 자아가 이드나 초자아, 또는 외부 세계에 그 기능을 양보하거나 조금이라도 포기한다면 그 즉시 부조화와 부적응이 나타난다.


자아는 쾌락 윈리 대신에 ‘현실 원리(reality principle)’에 의해 지배된다. 현실이란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현실 원리의 목적은 인간이 어떤 욕구를 만족시킬 실제적인 대상을 발견하거나 만들어낼 때까지 에너지의 방출을 잠깐 보류시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린 아이는 배고픔을 느낀다고 해서 아무것이나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먼저 음식물을 식별하는 법과 먹어도 해가 되지 않는 대상을 찾아 낼 때까지는 먹지 않고 참고 견디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라도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다.


어떤 행동을 유보하는 것은 적절한 형태의 행동에 의해 긴장이 완화될 수 있을 때까지 자아가 그 긴장을 참아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현실 원리가 설정된다고 해서 쾌락 원리가 유기(遺棄)되는 것은 아니다. 쾌락 원리는 현실을 위해 일시적으로 양보하는 것뿐이다. 사실상 자아는 현실적인 대상을 찾는 동안 약간의 불만을 견뎌내야 하지만, 결국은 현실 원리도 쾌락으로 가는 것이다.


현실 원리는 프로이트가 말하는 이른바 ‘제2차 과정’에 의해 지켜진다. 제2차 과정은 이드의 제1차 과정 이후에 전개되며, 또 그것을 압도한다, 제2차 과정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제1차 과정이 인간의 욕구를 만족시키면서 인간을 어디까지 일끌어 오는지 알 필요가 있다. 그섯은 욕구를 만족시킬 대상이 무엇인지, 그 연상 작용을 하는 단계까지만 이끌어 올 수 있다. 그 다음 단계는 대상을 찾거나 만들어내는 과정, 즉 그 대상을 현실적 존재로 만드는 과정이다. 이 단계가 보로 제2차 과정을 성취하는 단계이다. 제2차 과정은 사고와 이성(인식)을 통해 완벽한 행동을 취함으로써 현실을 발견하거나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흔히 제2차 과정을 문제 해결 과정 또는 사고 과정이라고 한다.


행동 계획이 효과적인지 아닌지 알아보기 위해서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길 때, ‘현실 검증(reality testing)’을 한다고 말한다. 현실 검증의 결과가 효과적이 아닐 때, 즉 소망하는 대상을 제대호 발견하거나 만들지 못했을 때는 새로운 행동 계획을 구성하고 검증을 반복한다. 결론적으로 이런 과정을 되풀이하여 올바른 현실(해결)을 찾아내게 되고, 긴장은 적절한 행동에 의해 완화된다. 배고픈 사람의 경우라면 음식을 먹는 행동이 곧 적절한 행동이 될 것이다.


제2차 과정은 제1차 과정이 할 수 없는 일, 즉 인간 내면의 주관적 세계와 물리적 현실의 갠관적 세계를 분리하는 일을 한다. 제2차 과정은 대상에 대한 심상을 마치 대상 그 자체처럼 간주하는 제2차 과정의 오류를 반복하지 않는다.


현실 원리가 작용하여 제2차 과정이 제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하면, 외부 세계는 인간의 일상에서 보다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되고 지각, 기억, 사고, 행동이라는 심리적 과정을 자극하여 제2차 과정이 보다 발전하고 정교해는 것을 돕는다.


지각계는 매우 섬세한 식별력을 갖게 되고, 따라서 오부 세계는 보다 정확하고 확실하게 지각된다. 지각계는 신속하게 세상을 살펴 복잡하게 받아들여지는 자극들로부터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는 환경만을 식별할 줄 알게 된다. 사고는 감각 기관을 통해 얻어지는 정보 이외에 기억계 속에 저장되어 있는 정보도 이용한다.


기억은 기억 대상들 사이에 사옿 관계를 맺어줌으로써, 기억을 표현하는 어떤 체계, 즉 언어를 발달시킴으로써 개선된다. 판단쳑이 날카로워지고, 보다 쉽게 진실(실제 존재하는 것)과 허위(존재하지 않는 것)를 분별할 수 있게 된다. 덧붙여서, 이러한 일련의 중요한 변화가 운동계에 일어난다는 것이다. 보다 노련하게 근육을 움직이고, 보다 복잡한 운동 양식을 수행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결국 심리적 기능에 잘 적응함으로써 보다 이지적이고 보다 효과적으로 행동활 수 있게 되며, 보다 큰 만족과 쾌락을 얻기 위해 충동과 환경을 다스릴 수 있게 된다. 자아는 이드와 외부세계 사이에서 매개체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복잡하게 조직된 심리적 과정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자아의 효과적으로 기능에는 현실에 충실한 과정 외에 이드의 제1차 과정과 같은 기능도 있다. 그것은 공상과 백일몽으로 만들어내는 기능이다. 그 기능은 현실을 철저히 검등해야 한다는 요구에 상관없이 쾌락을 원리를 좇는다. 그러나 이 자아 과정은 제1차 과정과는 조금 다른 점이 있다. 거기에는 제1차 과정에는 없는 현실과 공상을 구별하는 힘이 있는 것이다. 자아가 창출해내는 공상을 그 본질, 즉 재미있고 즐거운 상상의 산물에 불과하다는 본질이 충분히 인식되고 있다. 이러한 공상들이 결코 현실로 오해되는 법은 없지만, 공상은 자악 수행하는 더 진지한 책임으로부터 자아를 자유롭게 하여 휴식을 제공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자아는 환경과는 상호 작용 결과 발생한 산물이지만, 그 발전 경로는 우전으로 인해 상속되며 자연적 성숙을 거친다. 이 말을 뜻은 모든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사고와 논리의 잠재력을 지니고 태어난다는 것이다. 이 잠재력은 경험, 훈련, 교육등을 통해 실현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일반적인 정규 교육은 사람들에게 보다 효과적인 사고(思考)를 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을 주요 목표로 삼고 있다. 효과적인 사고란 진리와 일맥상통하는 사고를 말하며, 진리한 곧 존재하는 것을 말한다.

 

3. 초자아 (SUPEREGO)

 

인성을 구성하는 세번째 기구인 초자아는 인성의 도덕적.비판적 측면이다. 초자아는 현실적이라기보다는 이상적인 것을 대신하며, 현실이나 쾌락보다는 완전성을 지향한다. 즉 초자아는 인간의 도덕률(道德律)이다. 초자아는 어린아이가 부모로부터 선과 악, 덕과 죄에 대한 인식을 받아들인 결과 형성되는 것이며, 자아로부터 그 발달이 전개된다.


부모의 도덕적 인신을 받아들임으로써 어린아이는 부모의 것을 자기 자신의 내면적 인식으로 간주한다. 부모의 도덕전 인식을 자기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어린아이는 부모의 소망에 따라 행동하게 되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부모의 칭찬을 받을 수 있고 동시에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는 현실 원리에 복종해야 ㅎ나다는 것을 배울 뿐 아니라 그들은 항상 부모의 도덕적 지시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는 것도 배운다. 어린아이가 부모에 의존하는 기간이 길면 길수록 초자아의 형성에는 유리하다.


초자아는 ‘자아 이상(ego-ideal)’과 ‘양심(conscience)’이라는 두 개의 하위 체계로 이루어져 있다. 자아 이상은 부모의 도덕적 선이 무엇인지 어린아이가 알게 될 때, 그 어린아이가 형성하는 선(善)에 대한 개념과 관계가 있다. 부모는 어린아이가 자신들의 기준에 따라 행동하였을 때, 어떤 보상을 줌으로써 그 어린아이에게 부모의 도덕적 인식을 전달한다. 예를 들어, 어린아이가 매우 깨끗하고 단정한 태도를 보일 때마다 꾸준히 상을 주면 마침내 청결이 어린아이의 이상이 뒤기 십상이다. 반면, 양심은 부모가 느끼는 도덕적 악이 무엇인지 어린아이가 알고, 그 악의 개면을 형성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 그리고 이 악의 개념들은 벌을 받음으로써 확립된다. 어린아이는 더럽다고 해서 매번 벌을 받게 되면 불결을 굉장히 나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자아 이상과 양심은 동전의 앞뒷면처럼 동일한 도덕의 표리(表裏)이다.


부모가 어린아이의 초자아 형성을 조장하는 수단인 보상과 처벌에는 어떠한 것이 있는가? 그것은 육체적인 것과 심리적인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육체적 보상은 어린아이가 바라는 대고 그 대상을 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음식, 장난감, 어머니.아버지의 관심, 그리고 친절함 같은 것들이다. 육체적 처벌은 어린아이를 때린다거나 그가 원하는 것을 빼앗는다거나 해서 어린아이에게 신체적으로 고통을 주는 것이다. 심리적 보상으로서 매우 중용한 것은 말이나 표정으로 표현되는 부모의 칭찬이다. 칭찬은 사랑을 뜻하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사랑을 저버리는 것은 심리적 처벌의 주요 형태가 된다. 이것은 심하게 꾸짖거나 비난하는 표정을 지음으로써 표현된다. 물론 신체적 보상과 처벌도 이와 마찬가지로 사랑을 주거나 사랑을 저버리는 것이 될 수 있다. 매를 맞는 아이는 신체적인 아픔을 느낄 뿐만 아니라, 심리적으로 볼을 주는 부모가 자신에 대한 사랑을 저번린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나 사랑을 주거나 사라을 저버리는 것은, 그것이 기본적 욕구를 만족시켜 주느냐 또는 만족시켜 주지 못하느냐 하는 문제와 연관이 있을 때에 한해서 어린아이에게 호력을 나타낸다. 어린아이는 사랑을 주지 않는 어머니는 식탁의 음식에 손대지 못하게 하여 고통스러운 긴장 상태를 오래 가게 할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기 때문에, 어린아이는 어머니의 사랑을 구한다. 마찬가지로 꾸중을 하는 아버지는 매를 때림으로써 자신을 고통스럽게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아버지의 꾸중이 떨어질 일을 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보상과 처벌은 인간의 내적 긴장을 감소시키거나 증가시키는 상황인 것이 분명한다.


이렇듯 초자아가 부모가 어린아이를 다루는 것과 같은 지배력을 가지려면, 초자아는 스스로 자산의 도덕적 규율을 강요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한다. 초자아도 부모처럼 보상과 처벌을 통해 그 규율을 강요한다. 이들 보상과 처벌은 자아에게 가해진다. 자아는 인간의 행도을 규제하기 때문에 도적적 행동을 하나냐 아니면 부도덕한 행동을 하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자아의 책임인 것이다.


만약 초자아의 윤리적 기준에 맞는 행동이라면 자아는 거기에 대한 보상을 받는다. 그러나 자아가 초자아로부터 보상이나 철벌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육체적 행동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자아는 단순히 어떤 행동을 하려는 생각만으로도 보상이나 처벌을 받을 수 있따. 초자아가 보기에는 생각도 행동과 동일한 것이다. 이런 점으로 보아 초자아는 이드와 유사한 점을 지니고있다. 이드 또한 주관과 객관을 전혀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으로 덕망이 있는 생활을 하는 사람이라 하더라고 깊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괴로워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비록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는 생각이라 할지라고 그 생각이 올바른 것이 아니라면 초자아는 자아를 처벌하게 된다.


초자아가 이용할 수 있는 보상과 처벌에는 무엇이 있는가? 그것에도 육체적인 것과 ㅅ미리적인 것이 있따. 덕을 추구해 온 사람에게 초자아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당신은 오랫동안 선하게 살았으므로 이제 잔신을 즐길 시간을 가져도 좋소.” 그러한 것의 보상은 이제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이 멋진 식사, 긴 휴식, 또는 성적 만족일 것이다. 예를 들어, 대개의 경우 휴가는 열심히 일한 보상으로 생각된다.


도덕을 위반하는 사람ㅇ게ㅔ 초자아가 이런 말을 할 것이다. “당신은 지금껏 악하게 살아왔으므로 곧 어떤 불쾌한 일이 닥쳐 당신을 처벌할 것이다.” 그 불행은 위장병, 주치감, 또는 귀중품의 분실 등이 될 것이다. 프로이트는 이처럼 복잡미묘한 인성의 작용을 통찰하여 사람들이 병이 나거나 사고를 일으키거나 물건을 분실하는 원인을 밝혀 냈다. 모든 불행에는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잘못한 것에 대한 자기 처벌의 일면을 가지고 있다. 한 예로 어느 젊은이를 살펴보기로 하자. 이 젊은이는 아가씨와 성관계를 가진 얼마 후 자동차 사고는 내고 말았자. 대개의 경우 사람들은 죄의식과 사고 사이에 성립되는 모종의 관계를 깨닫지 못한다.


초자아가 주는 심리적 보상과 처벌은 자부심과 죄의식, 그리고 열등의식이다. 자아는 도덕적인 행동을 하거나 도덕적인 생가긍ㄹ 할 때 자부심을 느끼고, 유혹에 빠졌을 때는 수치심을 갖는다. 자부심은 자기애(自己愛)와 비슷한 것이고 죄의식이나 열등의식은 자기 증오(自己憎惡)와 유사한 것이다. 이러한 감정들은 모두 보모의 사랑과 부모의 배척이 내면화되어 그대로 나타나는것이다.


초자아는 사회가 지니고 있는 전통적 가치화 이상이 인성 속에서 발현된 것이다. 모든 전통적 가치화 이상은 부모에게서 자녀에게로 전승(傳承)되게 마련이다. 이런 점에서 어린아이의 초자아는 부모의 행동을 반영한다기보다는 부모의 초자아를 수용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어른들은 종종 말과 행동이 다를 때도 있지만, 그러나 무엇보다도 어린아이의 윤리적 기분을 형성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이 어른의 말이다. 그리고 그 말은 우협이나 선물로 뒷받침된다. 부모 외에 사회의 다른 여러 구성원들도 어린아이의 초자아 셩성을 돕는다. 교사, 목사, 경찰관--사실상 어린아이에게 귄위가 있는 지위를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다 마찬가지이다--등은 부모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 권위 있는 인물에 대한 어린아이의 반응은 부모로부터 어떤 것을 최초로 받아들였는지에 따라 크게 제한된다.


초자아의 목적은 무엇인가? 일차적인 목적은 충동을 억제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충동은 통제도지 않을 경우 사회의 안정을 위태롭게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성(性)과 외부 세계에 대한 공격에의 충동이다. 말을 안 듣고 방항적이거나 성적 호기심을 가진 어린이는 행실이 나쁘고 비도덕적인 아이로 간주된다. 문란한 성관계, 법을 어기는 어른, 그리고 대체로 파괴적이고 반사회적인 어른은 나쁜 인간으로 간주된다. 초자아는 내면에서 무법과 무정부를 억제함으로써 준법적인 사회 구성원이되게 한다.


만약 이드를 진화의 산물이면 생물학적 소양이 심리적으로 발현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자아를 객관적 현실과 교류한 결과이며 한 단계 위으이 고차원적인 심리 과정이라 생각한다면, 초자아는 사회화의 산물이며 문화적 전통을 전달하는 매개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독자는 이 세 체계(id,ego,superego)사이에 분명한 경계선이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이것들이 서로 다른 언어로 불린다고 해서 각기 독립된 개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드.자아.초자아 세 체계는 명칭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 명칭들은 전체 인성 속에서 서로 다른 기능, 과정, 작용, 그리고 역할 등을 나타내는 단순 간편한 구분에 지나지 ㅇ낳는다.


자아는 이드로부터, 그리고 초자아는 자아로부터 형성된다. 이것들은 일상생활을 통해 끊임없이 상호 작용하고 융화된다. 이러한 상호적 안정 상태로 되돌아온다. 환언하면, 본능의 목적은 그 본능을 일으킨 근본적인 것을 제거하는 것이다.


프로이트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안정이라는 최종 목표 이외에 본능은 다른 부수적인 것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최종 목표에 도달하려면 먼저 이 부수적 목표가 총족되어야 한다. 배고픔을 면하려면 우선 음식을 찾아 입에 넣는 일이 필요한 것과 같이 음식을 찾아 먹는 일은 배고픔을 해소하기 위해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본느이 최종 목표를 ‘내적 목표(internal aim)’라고 하고, 본는의 부수적 목표를 ‘외적 목표(external aim)’라고 했다.


본능은 매우 ‘보수적’이다. 이것은 흥분 과정으로 인해 심리적 혼란이 일어나기 이전의 안정 상태로 되돌아가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본능은 항상 긴장 상태로부터 휴식 상태로 향한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성충동을 만족시키려는 경우--최종적으로 긴장이 해소되기 전까지는 계속 긴장이 고조되기도 한다. 이러한 현사이 보능의 작용을 인도하는 일반 원리에 대한 반박이라고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성충동의 최종 목표는 흥분 상태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며, 최후의 긴장 해소에 이를 때까지 얼마나 많은 긴장이 발생하는가는 전혀 상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상 한동안 고조된 긴장 상태에서 어는 순간 벗어나는 것은 무척 기분 좋은 일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히려 긴장을 고조시키는 방밥을 터득하기도 한다. 다시 말하면 본능은 언제나 그 이전의 상태로 ‘퇴행(退行;regression)’하려고 한다. 본능이 흥분 상태에서 휴식상태로 되돌아오는 순환을 계속하려는 이런한 경향을 가리켜 ‘반복 강박(反復强迫;repetiton compulsion)’이라 한다. 반복 강박의 예는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다. 밤에 잠이 들었다가 아침에 깨어나는 현상이 규칙적이고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하나의 예이다. 하루 세 끼의 식사도 그렇고 일단 충족되었더라도 다시 일어나는 성욕 역시 그러한 일례이다.


요약해서 말한다면 본능의 목표는 지극히 보수적이고 퇴행적이며 반복적인 특성을 지닌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본능의 대상은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 혹은 그 대상이다. 식욕 본능의 대상은 음식을 먹는 것이며, 성욕 본능의 대상은 융화 작용의 세 체계 사이에서 전개되는 대립 작용과 마찬가지로 다음 장에 논의될 주제를 구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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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우문입니다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말입니다. 단지 시간이 흐르니까 지구가 도니까.. 거기에 수동적으로 돌아가는것인지.. 내 자신을 능동적으로 돌리고 있는것인지가 궁금해 졌단 말입니다..

매너리즘에 빠진것이 아니라 하루하루 흘러가는 시간이 너무나 아깝다는 생각입니다.. 어차피 이래도 저래도 흘러가는 시간인데 잡을수 없는 시간인데 좀더 효율적으로 사용을 할수는 없는것인가 하는생각 말입니다..


사람을 만나고 웃고
떠들고 또 그 다음날이 되고... 또 다른 사람을 만나고.. 반복적으로.. 그런 삶을 살고 있는데.. 이게 과연 내가 원하는 삶인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때로는 철저하게 혼자가 되고.. 또 여럿이 되고.. 글을 쓰면서도 내 마음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깨닫지 못하는것 같습니다..

누구나 간절히 원하는게 있게 마련입니다.. 누군에게나 간절히 원하면 자기가 원하는 만큼 들어준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 주체가 종교인지 개인 자신인지 본인 선택이겠지요...

누군가가 그랬습니다.. 세상은 죽을때도 죽어서도 모르는것이란다.. 그러니 그냥 느끼는  대로 살아라.. 정답을 찾으려고 하지말고 .. 지혜를 찾으라고 합니다 .. 

지금 솔직히 좀 외롭습니다 ..  다른게 외로운게 아니라.. 제 내심이 외로운가 봅니다.. 연애의 외로움이 아닌 내 안의 작은 내가 외로움을 타고 있나 봅니다..하지만 내 자신은 항상 긍정적인 삶으로  가려고 무진장 노력하거든요.. 그래도 노력하니까 조금식 바뀌네요..

그러니 얼마 되지 않는 제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 하루하루 변하세요..근데 좋게 변하세요.. 긍정적으로요..

뭐가 정말 하고 싶은데... 뭐가 정말 하지 못하게 하고.. 결국은 뭐가 중재를 시키네요... 이게 프로이트 선생의 이론인가 봅니다..

하루 마무리 잘들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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