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수'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0.06.07 인생에서 가장 기억나는일

딱히 특별한 주제도 없습니다.. 시간이 나길래 머리속을 가상화면으로 열어보니 할말은 많은데 정리가 안되네요..

사실상 이리저리 홍반장도 아니고 말할거리가 많은데 깊이가 없네요.. 그러면서 생각해봅니다..

내 지나온 시절은 어떠했는지를 말입니다..

먼저 지나온 시절을 생각해보면..  불행했던 시절은 없었던것 같습니다.. 마음 아픈 시절과 순간들은 너무나도 많았지만, 그것이 불행으로 승화(?)되었던 적은 없는것 같습니다..

1975년 태어나서 (사실상 태어났는지도 몰랐지요...누군들 아나요.. 부모님의 사랑으로 만들어진 작품인걸요..) 

1981년 유치원을 다니던 시절부터가 생각나네요.. 아 이당시 서울 여의도에 놀러가서 국풍81인가 하는 축제에 외할머니와 함께 간 기억이 나네요.. 거기서 마패를 샀던 기억도 있는데...중요한건 아래입니다.

(유치원 재학(?) 당시 엄마한테 받은 100원을  아무도 모르게 숨겨놓고 나중에 파면 1000원이 될거라는 생각에 유치원 앞 마당에 묻은 기억이 나네요..묻고나서 유치원졸업때즘 숨겨놓은 100원을 파려고 위치를 보니 어딘지 알턱이 있나요.. 동개 똥개가 먹을거 찾아다니듯 두리번 거리는 모습을 본 부모님은 뭘 그리 찾느냐고 물어보길래 아무 대답을 못했지요..) 

1982년 국민학교 ..(지금은 초등학교라고 불리는 그 학교를 들어가서 담임선생님의 이쁨을 받고 무럭무럭 자랐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그 지방에 차로 아이 데려다 주는 집이 드물었거든요..)

1983년 국민학교 2학년때인가요...

(서울에 가서 이모님댁하고 자연농원을 갔다가 누군가 사준 메달을 가지고 그 다음날 학교에 갔다가 골마루라고 하지요 ? 지금은 학교가 대부분 콘크리트나 뭐 이런거지만 그당시만해도 골마루가 대부분이었습니다. 하여간 그 골마루 구멍난곳으로 메달이 쑥 빠져들어갔습니다. 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하늘이 노랗게 보일때도 있구나 하는것을 말입니다. 아직 순진할때였는지 친구들과 함께 (반강제지요)  그 뚫린 골마루를 보면서 " 하느님! 이 목걸이를 꺼내주세요~" 하면서 기도를 드렸는데, 기도가 약했나봅니다.. 무릅마 아프더라구요..)

1986년 5학년때이지요..

(학교  전교 어린이 부회장이 되던 때였습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전체조회시간에 나가서 6학년 회장형이랑 6학년 부회장 누나 그리고 나 3명이서 교장선생님한테 임명장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무슨활동을 했는지는 기억이 안납니다.
꼭 지금의 정치활동 같지요.. 나름 선거할때는 "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거창한 선거유세를 했지만 막상 부회장이 되고나니 뭘 하는건지 잘 모르겠더군요...)

그리고 1987년 아.. 이래서 사람들이 정치를 하는구나..

(이제 내가 6학년이니 전교회장에 출마를 했습니다.  돌아다니면서 부회장후보와함께 바쁜 일정을 소화했지만 결국 옆동네 살던  친한 여자친구한테 회장자리를 내주었습니다. 그리고 아마 울었지요... 그 후로 지금 이순간까지 자리에는 절대 연연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초등학교 시절이 지났나 봅니다.

1988년 중학교를 들어가면서

(아 나도 이제 성인이 되어가는구나.. 공부라는거 정말 열심히 해야 하는구나 했지만.. 중학교가 남녀공학인지라 어려서부터 왜이리 예쁜애들이 눈에 뛰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더군다나 공부를 열라게 잘했던 우리친형 중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지금 그 문제가 많다는 대원외고에 입학을 했습니다. 그게 그렇게 유명한 학교인지는 몰랐습니다 그 당시에는요. 지금 뉴스보면 아.. 형 나온학교가 좋은곳이구나 라는 생각을 합니다.)

1989년 형 따라 서울로..

(형이 서울로 학교를 가다보니 저 또한 어쩔수 없이 전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일명 8학군으로 가야 했는데  거주기간이 모자라니 신청하고 기다리라고 하더군요. 그리하여 강남구 일원동에 거주를 하면서 동작구 상도동에 있는 장승중학교라는곳을 다녔네요.. 거기서는 딱히 생각나는게 없습니다..  한 8개월인가만에  학교를 집앞으로 옮겼습니다. 거기가 오세훈 시장이 나온 곳인줄은 그당시에는  몰랐지요...)

1991년 다시 흑석동으로...

(중동중학교라는  나름 명문학교를 졸업은했지만 이거 뭐 지방 촌놈이 올라와서 서울 그것도 강남애들하고 겨룰라니 뭐 하나 되는게 없더군요. 성적은 뚝뚝 떨어지고, 중3때는  어여어여 하다보니 일찍이 찾아온 질풍노도의 시기에 빠져서 담배를 피우게 되고.. 그나마 다행인건  술은 구역질 나더군요.. 그렇게 졸업을 하고 또 무슨 개월수가 모자란다고 다시 동작구 흑석동에 중대부고로 넘어갔습니다. 현실에서는 중대부고가 명문고로 탈바꿈했지요...사실상 여기서 친한친구들은 다 만난것 같습니다. 지금도 어제도 아침에도 대화를 하는 놈들이 다 이때 만났던 아이들 입니다..  누구나 그렇지만 고등학교 친구들이 오래가는것 같고, 추억도 많고.. 그래서 영화소재도 고등학교 소재가 많지, 중학교, 초등학교, 대학교는 없나 봅니다)

1992년 이제는 청주로...회귀

(무슨 이유에서인지 엄마는 저를 다시금 청주로 회귀를 시키네요.. 고향이긴 하지만 서울물에서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은지라 촌스러운 느낌이 팍팍 들어서요...별로 도움이 안되더라구요.. 햄버거집 누나를 놓고 어릴때부터 친구랑 주먹다짐도 하고, 친구들 몽땅 데리고 서울로 가서 이태원에서 술도 마셔보고, 락카페에가서 여자도 꼬셔보고.. 하다보니 점점 수능하고는 멀어지더군요...)

1993년 난생 처음 수능이라는것을 보면서..

(이 당시 수능을 두번 보았지요... 여름에 한번 겨울에 한번 그리고는 잘 나온 점수를 택해서 대학갈수 있다고 해서.. 참 열심히 공부를 해봤는데... 점수는 영... 시원하지가 않더군요... 여름에 점수 잘 받은 애들은  학교 쉬엄쉬엄 다니는데.. 저를 포함한 일부 아이들은 휴휴... 하면서 겨울을 기다렸는데... 참... 그점수가 그점수더군요...  이렇게 졸업을 하는구나.. )

1994년  대학이라는곳에 입학..

(대학 1학년 시절... 나름  열린환경이다보니 공부도 잘되더라구요.. 근데 그것도 한때 이제 당구치고, 술먹고, CC끼리 놀러다니고 하다보니..  크.. 영장이 나오네요... 연기는 안했습니다. 빨리 가야지요...)

1995년 1월 12일 

(육군 제32사단 신병교육대에 입소를 하는 날이었습니다. 엄마차에 친구들, 애인 저까지 다 타고 갔습니다. 아아.. 군대라는게 무엇일까 ? 그냥 선배들이 말하던 그런 지옥같은 곳일까 .... 정말 병장되면 편해지는것일까 등등의 생각을 하고 어마어마하게 큰 위병소를 지나가고 커브를틀자마자... 이런 dog 새끼들 전부  대가리바가..~ 라는 조교의 말에.. 휴.. 그냥 다시 나가서 좀 연기를 하고 나중에 올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근데 이게 웬일입니까.. 지금 글을 쓰는 지금 이순간 저 .. 이제 민방위도 아닙니다... 그렇게나 시간이 흐른 셈입니다...)

1996년 슬픈한해

(군대 상병시절.. 아직 제대날짜를 세어봐서는 안되는 짬이지만.. 그렇게 나름 적응을 하고 있던시절.. 중대장님으로부터 호출이 왔습니다.. "충수야.. 아버지가 운명하셨단다.." .... 아... 정작 왜 반응이 오지 않는것일까.. 아니 실감이 안나서.. 뭔가.. 마음이 설명할수 없는 블랙홀에 빠지는듯 했습니다.  그나마 근무하던곳이 논산이었고..집은 청주라서 빨리 갈수 있었지만, 가보니 정말 아버지는 영정사진에 계시더군요.. 가족, 부모잃은 슬픔이라는거.. 말하지 않아도 느끼실수 있을겁니다... 상상만해도.. 참.. 슬픈일입니다...)

1997년 공부...하자..

(아버지가 그렇게 가시고나서 예전에 서울에 계셨을때 하셨던 말씀이 지금도 가슴에  메아리를 치더군요..

"괜히 공부하라는거 아니다.. 다 필요가 있는것이다.. 그리고 그때를 대비해서 미리 공부를 하는것이다..니가 지금 하기 싫어도 언젠가는 그 필요성을 느낄것이다. 국영수만이 공부는 아니다.. 살기위한 공부도 해야한다.. 그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은 좀더 편하게 살것이고, 아니라면 어쩔수 없이 힘든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고는 복학을 앞둔 1년간 참 영어공부 많이 햇습니다.. 토플도 공부하고... 단어도 많이 외우고.. 그리하여 좀더 좋은 학교로 갈수 있었습니다...

1999년~ 2001년  새로운  인생..

나이를 한살 한살 먹어가면서 인생에 대한 생각을 참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도 선을 만들어야 하고..그래서 참 열심히 살았던것 같습니다. 과일도 열심히하고 주말에는 알바하면서 1주일 생활비 벌고, 각종공모대회에 나가서 입상하여 상금도 받았고... 그걸로  해외여행도 다니고 그랬습니다.. 한 대회에서는 입선 아니 장려상 받았는데, 50만원인가 상금이 나와서 제가 번돈하고 합쳐서 100만원을 만들어서 엄마한테 나 캐나가 다녀오렵니다.. 했더니 그건 용돈쓰고 비행기표는 엄마가 해준다고 하시더라구요.. 그렇게 캐나다에 가서 여름을 지내고 오면서 거기 거주하고 있던 베프한테 신세를 많이 지게 되었습니다.. 그때를 시작으로 해서.. 외국을 참 많이 나간것 같습니다. 학교에서 주최한 BK21 지원으로 일본 전역을 15일동안 돌아볼수 있는기회도 있었답니다..

2001년  대학원 시절... 2003년

누가 알았겠습니까... 제가 대학원까지와서 공부를 할줄을요... 참 알차게 보낸 2년이었습니다.. 학교일.. 조교일.. 연구실일.. 각교수님일들.. 그리고 학교 교직원분들과의 친분관계 거기다가  통계프리랜서를 통해서 하루 24시간이 짧을날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대학원 원우회에 들어가면서...(이거는 앞서 밝힌 한자리가 아닙니다^^) 원우회분들하고 학술자원답사도 가고.. 친한 선배랑 호주를 한 2주 다녀오고..  알차게 알차게 보내다보니... 어느세 졸업이더군요.. 논문을 마무리하고.. 학교에 남을지 취업을 할지 고민하다가.. 교육기관의 공부는 여기까지만 하자... 이제 일을 하자 라는 생각에 여기저기 원서를 냈는데 다행히도  빨리 취업이 되었네요... 그나마도 제가 유통으로 논문을 썼는데... 유통회사에 들어가게 되었지요... 현재는  GS리테일이엇다가.. 아마도 롯데마트로 또 넘어갔다던데...^^

2004년 유학준비...

첫직장을 1년정도 하고 사직을 하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맘이 떠났습니다.. 그 이유는 공부에 대한 미련이었나 봅니다.. 그래서  한동안 손을 놓았던 토플을 다시 공부하고 그렇게 미국학교에 원서를 내고.. 갈망하던 I-20를 받고 나서 아... 또 새롭게 한번 가보겠구나 라는 마음가짐이 들더군요..

2005년 -2006년  미국에서의 2년...

결론먼저 말씀드리자면 학교 졸업 무사히 잘했습니다...^^ 근데 더 큰것을 얻었던 것은 한정된 제 머리속의 마인드였습니다. 그 큰 미국땅 반을 돌아다녀봤고.. 좋은 한인분들을 많이 만나뵙고.. 훌륭하신 교수님들도 만날수 있었던 기회였습니다. 미국땅의 5분의1을 차지한다는 알라스카를 차로 끝에서 끝까지 다녀기도 하고.. 일본사람들이 남아를 낳기 위해서 간다는 유황온천도 가보고... 연어사업을 위해서 연어상선도 보고... 참 유익한 시간들이었습니다..





2007년 -2009년
  다시 직장.....


점점..  말수가 적어지지요... 아마도 최근의 일일수록 점점 말할게 없어지나봅니다.. 아직 추억이라고 하기엔 기간이 짧아서일까요... 글쓰기가 망설여지네요...  아마도 한 10년지나면 또 많은 글들을 쓸 칸이 되리라 생각하고 비워두겠습니다.

2010년 오늘...

세상 누구보다도 행복하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과도한 욕심보다는 현명한 욕심으로 삶을 살고.. 내 몸도 아끼고.. 내 마음또한 아끼는 그러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누구와 비교하는 삶도.. 누구를 시기하거나 질투하는 삶도 아닌.. 그냥 이충수 만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렇게 지금을 살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