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 록키산맥을 볼수 있다는 것은 운이요.. 여름에 록키산맥을 볼수 있다는 것은 천운이라고 했다.. 누가 그랬냐고.. 내 느낌이다.

 

온통 사방이 눈이다. 눈을 그렇게나 좋아해서, 알라스카를 갔건만, 이곳 록키산맥의 겨울 눈은 그 거대함이 또 남다르다. 뒤에 보이는 호텔의 이름은 이제 기억이 안나지만 겨울철 1박에 5,000불은 기본이라는 가이드의 설명을 들은 기억이 난다.

 

눈의 나라에서 눈의 고장을 보면서도 느끼는 아름다움 감정.. 굳이 과거라고 표현할 필요는 없는것 같다. 단지 내마음속이라는 표현이면 충분하다.

 

 

 

잠시나마 여행을 같이 했던 무리들. 오른편 두번째에 백발의 젊은 분이 내 은사님이시다. 대학시절 인연으로 하여 대학원졸업후 지금까지도 종종 연락을 드리며 지내는 건방지지만 내가 인정하는 몇 안되는 은사님중의 한분이다.

 

나머지 동행들은 이제 이름도 모르고, 하는일도 모른다. 기억나는건 어떤 부부가 오셨는데, 나한테 자기딸 소개시켜준다고 연락처 받아가고, 어떤 선생님 커플은 자기학교 선생님 소개시켜준다고 메일주소 받아갔다. 그리고는 연락이.....

 

 

있었다.... 하지만 이몸 알라스카에 묶여있는몸 초대를 하고 싶어도 그러하지 못하여 만남으로 까지 이루어 지지는 못하였다. 그러한 불운(?) 때문에 지금의 와이프를 만난건지도 모를일이다..

 

 

캐나다에 오면 밴쿠버에 오면 반드시 들려야 한단다.. 랍슨 스퀘어라고 교수님 내외분과 가족들. 주현이 주희랑 같이 .. 이 아이들이 그당시 고등학생 대학생이었는데 벌써 졸업을 해서 귀국해서 나름 사회에서 자리를 잡고 있단다.

 

가서 보고싶은데, 인천이면 얼마 멀지도 않은데, 교수님한테 인사도 드릴겸 찾아가면 되는데, 마음의 거리는 그렇게 큰가보다.

 

그래서 의례적으로 하는말이

 

' 언제한번 들릴께... 언제한잔해... 자주 연락드리겠습니다...' 이말 자주하면서도 참 싫은 말이다.. 그냥 말없이 행동하는 사람이 었으면 하는 내 자심의 바램이다. 책을 읽다보니 세계 각국의 저자들이 하는말이 참 다르다.. 교수, 심리학자, 정신과 전문의, 행복전문가 등의 글을 읽어봐도 마땅히 답을 주는게 없다는건 누구나가 알것이다. 단지 그러한 책의 제목을 통해서 우리가 뭔가 얻을수 있다는 또 하나의 욕심으로 책을 접해서 그런게 아닌가 싶다.

 

30대를 마무리하면서 지금 드는 생각은 앞으로 인생의 반을 살았는지, 다 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의 과다한 생각들이 과연 내 인생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었는가를 생각해보면 결론은 미미한 수준이다라는것이다. 너무다 과다한 생각이 가끔은 육체적으로 두통이라는 짐도 주어줄뿐 실질적으로 그렇게 과다하게 생각했던 걱정들이 아직까지 일어나지는 않았다.

 

단지, 그러한 면을 알면서도 또 과다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점이 아이러니 하면서도 내가 인간이기에 이럴수 있다는 점을 가간과하지 않으려고 한다.

 

생각나면 생각하면 된다.. 생각도 나의 일부인데 어찌 떼어버릴려고만 하는가. 나의 몸과 나의 정신은 하나지 결코 따로 분리할수가 없다는 너무나 당연한 논리를 가지고도 우리는 많은 생각에 접어 들기만 한다.

 

...... 아마 30대 마지막 한달의 글에서 미국생활 2년의 글이 가장 많을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라스베가스로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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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그 노래가 생각나네요. 


화요일에 비가 내리면. 오늘이 딱 그 노래와 어울리지 않나 싶습니다. 


"슬픈 화요일에 비가 내리면.... " 근데 슬픈 화요일은 아니고 뭐랄까 조용한 화요일 정도가 되겠네요


시원스럽게 내리는 비도 아닌것이 부슬부슬 내리면서 사람 애간장을 녹인다고나 할까요..


아침에 근래에 몸이 안좋았던 형하고 커피를 마시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네요. 


사람이 아프면 생각을 많이 하게 되고 변하게 되고, 그리고 건강해지면 또 변하게 되나봅니다.


저도 그랬으니까요..



정확히 13년전이네요. 캐나다에서 유학시절 유일한 교통수단인 자전거 타고 토론토 시내를 활보하던 때입니다.



시간이 소중하다는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시간을 허비하지 말아야 하는것도 알아야 하는 사실이지만 그것 때문에 시간에 쫒기고 살지는 않았나 돌아 봅니다. 


어느누구에게도 이것만큼은 공평한 시간인데 사용하기에 따라서는 큰 차이가 있을수도 있지요. 


하지만 그 모든것도 마음에서 나타나는 차이일뿐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은 없습니다. 


점점 세상을 알아간다고 할때 또 한번 경각심을 주는 일들이 생기지요. 


세상 살아가는 일에 거만을 떨어서는 안될것 같습니다. 세상과 자연은 언제나 저보다 한수 위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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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특별한 주제도 없습니다.. 시간이 나길래 머리속을 가상화면으로 열어보니 할말은 많은데 정리가 안되네요..

사실상 이리저리 홍반장도 아니고 말할거리가 많은데 깊이가 없네요.. 그러면서 생각해봅니다..

내 지나온 시절은 어떠했는지를 말입니다..

먼저 지나온 시절을 생각해보면..  불행했던 시절은 없었던것 같습니다.. 마음 아픈 시절과 순간들은 너무나도 많았지만, 그것이 불행으로 승화(?)되었던 적은 없는것 같습니다..

1975년 태어나서 (사실상 태어났는지도 몰랐지요...누군들 아나요.. 부모님의 사랑으로 만들어진 작품인걸요..) 

1981년 유치원을 다니던 시절부터가 생각나네요.. 아 이당시 서울 여의도에 놀러가서 국풍81인가 하는 축제에 외할머니와 함께 간 기억이 나네요.. 거기서 마패를 샀던 기억도 있는데...중요한건 아래입니다.

(유치원 재학(?) 당시 엄마한테 받은 100원을  아무도 모르게 숨겨놓고 나중에 파면 1000원이 될거라는 생각에 유치원 앞 마당에 묻은 기억이 나네요..묻고나서 유치원졸업때즘 숨겨놓은 100원을 파려고 위치를 보니 어딘지 알턱이 있나요.. 동개 똥개가 먹을거 찾아다니듯 두리번 거리는 모습을 본 부모님은 뭘 그리 찾느냐고 물어보길래 아무 대답을 못했지요..) 

1982년 국민학교 ..(지금은 초등학교라고 불리는 그 학교를 들어가서 담임선생님의 이쁨을 받고 무럭무럭 자랐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그 지방에 차로 아이 데려다 주는 집이 드물었거든요..)

1983년 국민학교 2학년때인가요...

(서울에 가서 이모님댁하고 자연농원을 갔다가 누군가 사준 메달을 가지고 그 다음날 학교에 갔다가 골마루라고 하지요 ? 지금은 학교가 대부분 콘크리트나 뭐 이런거지만 그당시만해도 골마루가 대부분이었습니다. 하여간 그 골마루 구멍난곳으로 메달이 쑥 빠져들어갔습니다. 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하늘이 노랗게 보일때도 있구나 하는것을 말입니다. 아직 순진할때였는지 친구들과 함께 (반강제지요)  그 뚫린 골마루를 보면서 " 하느님! 이 목걸이를 꺼내주세요~" 하면서 기도를 드렸는데, 기도가 약했나봅니다.. 무릅마 아프더라구요..)

1986년 5학년때이지요..

(학교  전교 어린이 부회장이 되던 때였습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전체조회시간에 나가서 6학년 회장형이랑 6학년 부회장 누나 그리고 나 3명이서 교장선생님한테 임명장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무슨활동을 했는지는 기억이 안납니다.
꼭 지금의 정치활동 같지요.. 나름 선거할때는 "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거창한 선거유세를 했지만 막상 부회장이 되고나니 뭘 하는건지 잘 모르겠더군요...)

그리고 1987년 아.. 이래서 사람들이 정치를 하는구나..

(이제 내가 6학년이니 전교회장에 출마를 했습니다.  돌아다니면서 부회장후보와함께 바쁜 일정을 소화했지만 결국 옆동네 살던  친한 여자친구한테 회장자리를 내주었습니다. 그리고 아마 울었지요... 그 후로 지금 이순간까지 자리에는 절대 연연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초등학교 시절이 지났나 봅니다.

1988년 중학교를 들어가면서

(아 나도 이제 성인이 되어가는구나.. 공부라는거 정말 열심히 해야 하는구나 했지만.. 중학교가 남녀공학인지라 어려서부터 왜이리 예쁜애들이 눈에 뛰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더군다나 공부를 열라게 잘했던 우리친형 중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지금 그 문제가 많다는 대원외고에 입학을 했습니다. 그게 그렇게 유명한 학교인지는 몰랐습니다 그 당시에는요. 지금 뉴스보면 아.. 형 나온학교가 좋은곳이구나 라는 생각을 합니다.)

1989년 형 따라 서울로..

(형이 서울로 학교를 가다보니 저 또한 어쩔수 없이 전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일명 8학군으로 가야 했는데  거주기간이 모자라니 신청하고 기다리라고 하더군요. 그리하여 강남구 일원동에 거주를 하면서 동작구 상도동에 있는 장승중학교라는곳을 다녔네요.. 거기서는 딱히 생각나는게 없습니다..  한 8개월인가만에  학교를 집앞으로 옮겼습니다. 거기가 오세훈 시장이 나온 곳인줄은 그당시에는  몰랐지요...)

1991년 다시 흑석동으로...

(중동중학교라는  나름 명문학교를 졸업은했지만 이거 뭐 지방 촌놈이 올라와서 서울 그것도 강남애들하고 겨룰라니 뭐 하나 되는게 없더군요. 성적은 뚝뚝 떨어지고, 중3때는  어여어여 하다보니 일찍이 찾아온 질풍노도의 시기에 빠져서 담배를 피우게 되고.. 그나마 다행인건  술은 구역질 나더군요.. 그렇게 졸업을 하고 또 무슨 개월수가 모자란다고 다시 동작구 흑석동에 중대부고로 넘어갔습니다. 현실에서는 중대부고가 명문고로 탈바꿈했지요...사실상 여기서 친한친구들은 다 만난것 같습니다. 지금도 어제도 아침에도 대화를 하는 놈들이 다 이때 만났던 아이들 입니다..  누구나 그렇지만 고등학교 친구들이 오래가는것 같고, 추억도 많고.. 그래서 영화소재도 고등학교 소재가 많지, 중학교, 초등학교, 대학교는 없나 봅니다)

1992년 이제는 청주로...회귀

(무슨 이유에서인지 엄마는 저를 다시금 청주로 회귀를 시키네요.. 고향이긴 하지만 서울물에서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은지라 촌스러운 느낌이 팍팍 들어서요...별로 도움이 안되더라구요.. 햄버거집 누나를 놓고 어릴때부터 친구랑 주먹다짐도 하고, 친구들 몽땅 데리고 서울로 가서 이태원에서 술도 마셔보고, 락카페에가서 여자도 꼬셔보고.. 하다보니 점점 수능하고는 멀어지더군요...)

1993년 난생 처음 수능이라는것을 보면서..

(이 당시 수능을 두번 보았지요... 여름에 한번 겨울에 한번 그리고는 잘 나온 점수를 택해서 대학갈수 있다고 해서.. 참 열심히 공부를 해봤는데... 점수는 영... 시원하지가 않더군요... 여름에 점수 잘 받은 애들은  학교 쉬엄쉬엄 다니는데.. 저를 포함한 일부 아이들은 휴휴... 하면서 겨울을 기다렸는데... 참... 그점수가 그점수더군요...  이렇게 졸업을 하는구나.. )

1994년  대학이라는곳에 입학..

(대학 1학년 시절... 나름  열린환경이다보니 공부도 잘되더라구요.. 근데 그것도 한때 이제 당구치고, 술먹고, CC끼리 놀러다니고 하다보니..  크.. 영장이 나오네요... 연기는 안했습니다. 빨리 가야지요...)

1995년 1월 12일 

(육군 제32사단 신병교육대에 입소를 하는 날이었습니다. 엄마차에 친구들, 애인 저까지 다 타고 갔습니다. 아아.. 군대라는게 무엇일까 ? 그냥 선배들이 말하던 그런 지옥같은 곳일까 .... 정말 병장되면 편해지는것일까 등등의 생각을 하고 어마어마하게 큰 위병소를 지나가고 커브를틀자마자... 이런 dog 새끼들 전부  대가리바가..~ 라는 조교의 말에.. 휴.. 그냥 다시 나가서 좀 연기를 하고 나중에 올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근데 이게 웬일입니까.. 지금 글을 쓰는 지금 이순간 저 .. 이제 민방위도 아닙니다... 그렇게나 시간이 흐른 셈입니다...)

1996년 슬픈한해

(군대 상병시절.. 아직 제대날짜를 세어봐서는 안되는 짬이지만.. 그렇게 나름 적응을 하고 있던시절.. 중대장님으로부터 호출이 왔습니다.. "충수야.. 아버지가 운명하셨단다.." .... 아... 정작 왜 반응이 오지 않는것일까.. 아니 실감이 안나서.. 뭔가.. 마음이 설명할수 없는 블랙홀에 빠지는듯 했습니다.  그나마 근무하던곳이 논산이었고..집은 청주라서 빨리 갈수 있었지만, 가보니 정말 아버지는 영정사진에 계시더군요.. 가족, 부모잃은 슬픔이라는거.. 말하지 않아도 느끼실수 있을겁니다... 상상만해도.. 참.. 슬픈일입니다...)

1997년 공부...하자..

(아버지가 그렇게 가시고나서 예전에 서울에 계셨을때 하셨던 말씀이 지금도 가슴에  메아리를 치더군요..

"괜히 공부하라는거 아니다.. 다 필요가 있는것이다.. 그리고 그때를 대비해서 미리 공부를 하는것이다..니가 지금 하기 싫어도 언젠가는 그 필요성을 느낄것이다. 국영수만이 공부는 아니다.. 살기위한 공부도 해야한다.. 그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은 좀더 편하게 살것이고, 아니라면 어쩔수 없이 힘든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고는 복학을 앞둔 1년간 참 영어공부 많이 햇습니다.. 토플도 공부하고... 단어도 많이 외우고.. 그리하여 좀더 좋은 학교로 갈수 있었습니다...

1999년~ 2001년  새로운  인생..

나이를 한살 한살 먹어가면서 인생에 대한 생각을 참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도 선을 만들어야 하고..그래서 참 열심히 살았던것 같습니다. 과일도 열심히하고 주말에는 알바하면서 1주일 생활비 벌고, 각종공모대회에 나가서 입상하여 상금도 받았고... 그걸로  해외여행도 다니고 그랬습니다.. 한 대회에서는 입선 아니 장려상 받았는데, 50만원인가 상금이 나와서 제가 번돈하고 합쳐서 100만원을 만들어서 엄마한테 나 캐나가 다녀오렵니다.. 했더니 그건 용돈쓰고 비행기표는 엄마가 해준다고 하시더라구요.. 그렇게 캐나다에 가서 여름을 지내고 오면서 거기 거주하고 있던 베프한테 신세를 많이 지게 되었습니다.. 그때를 시작으로 해서.. 외국을 참 많이 나간것 같습니다. 학교에서 주최한 BK21 지원으로 일본 전역을 15일동안 돌아볼수 있는기회도 있었답니다..

2001년  대학원 시절... 2003년

누가 알았겠습니까... 제가 대학원까지와서 공부를 할줄을요... 참 알차게 보낸 2년이었습니다.. 학교일.. 조교일.. 연구실일.. 각교수님일들.. 그리고 학교 교직원분들과의 친분관계 거기다가  통계프리랜서를 통해서 하루 24시간이 짧을날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대학원 원우회에 들어가면서...(이거는 앞서 밝힌 한자리가 아닙니다^^) 원우회분들하고 학술자원답사도 가고.. 친한 선배랑 호주를 한 2주 다녀오고..  알차게 알차게 보내다보니... 어느세 졸업이더군요.. 논문을 마무리하고.. 학교에 남을지 취업을 할지 고민하다가.. 교육기관의 공부는 여기까지만 하자... 이제 일을 하자 라는 생각에 여기저기 원서를 냈는데 다행히도  빨리 취업이 되었네요... 그나마도 제가 유통으로 논문을 썼는데... 유통회사에 들어가게 되었지요... 현재는  GS리테일이엇다가.. 아마도 롯데마트로 또 넘어갔다던데...^^

2004년 유학준비...

첫직장을 1년정도 하고 사직을 하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맘이 떠났습니다.. 그 이유는 공부에 대한 미련이었나 봅니다.. 그래서  한동안 손을 놓았던 토플을 다시 공부하고 그렇게 미국학교에 원서를 내고.. 갈망하던 I-20를 받고 나서 아... 또 새롭게 한번 가보겠구나 라는 마음가짐이 들더군요..

2005년 -2006년  미국에서의 2년...

결론먼저 말씀드리자면 학교 졸업 무사히 잘했습니다...^^ 근데 더 큰것을 얻었던 것은 한정된 제 머리속의 마인드였습니다. 그 큰 미국땅 반을 돌아다녀봤고.. 좋은 한인분들을 많이 만나뵙고.. 훌륭하신 교수님들도 만날수 있었던 기회였습니다. 미국땅의 5분의1을 차지한다는 알라스카를 차로 끝에서 끝까지 다녀기도 하고.. 일본사람들이 남아를 낳기 위해서 간다는 유황온천도 가보고... 연어사업을 위해서 연어상선도 보고... 참 유익한 시간들이었습니다..





2007년 -2009년
  다시 직장.....


점점..  말수가 적어지지요... 아마도 최근의 일일수록 점점 말할게 없어지나봅니다.. 아직 추억이라고 하기엔 기간이 짧아서일까요... 글쓰기가 망설여지네요...  아마도 한 10년지나면 또 많은 글들을 쓸 칸이 되리라 생각하고 비워두겠습니다.

2010년 오늘...

세상 누구보다도 행복하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과도한 욕심보다는 현명한 욕심으로 삶을 살고.. 내 몸도 아끼고.. 내 마음또한 아끼는 그러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누구와 비교하는 삶도.. 누구를 시기하거나 질투하는 삶도 아닌.. 그냥 이충수 만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렇게 지금을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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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글을 쓰기에 앞서 이런생각을 합니다.. 이 글을 소수나마 볼수 있겠구나.. 그러니까 약간은 재미성을 넣어야 겠구나.. 하는생각요... 그래서 제 진실된 이야기에 아니면 진실된 생각에 약간씩의 허구가 들어가기도 하는거 같습니다..

그러나 이건 여자들한테 군대 이야기 하는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듣는 여자는 하나도 재미없게 생각하는데 정작 본인은  군대에서 자기 생활을 너무나도 화려하게 장식한다는거죠.. 남자분들 경험해보셨겠지만.. 휴가전날 군복을 엄청나게 다림질하고.. 전투화를 광이 나도록 손질하고.. 몰래 사들도 들오온 사제팬티를 입고 나름 뿌듯하게 휴가를 나갑니다.. 모든사람이 자신을 쳐다보는듯한 그런 느낌을 받죠..

그러나 실제 우리가 제대하고 사회인으로서 보는 군인은 어떠합니까.. 그냥 군인입니다.. 줄세워 옷입고 광나는 전투화를 신은 멋있는 군인이 아니라.. 그냥 힘들게 군생활 하는 군인일뿐입니다. 이게 아마도 꾸밈과 진실이 아닐까 합니다..

제가 아무리 여기서 제 인생을 꾸미어 본들 제 진실은 진실된 모습은 꾸미어 지지 않습니다.. 제 인생의 발자취를 남기기 위해서 쓰기 시작한 블로그입니다.. 단지 남들에게 공개를 하고 발행을 하는 이유는 나란 사람이 이렇게 살고 있고, 이런 고민을 가지고 있으니 혹여나 공감이 가시는 분들은 같이 한번 생을 생각해보자는 차원입니다..

어느 순간에 자기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숨긴적이 있는지 한번 생각해 봐주세요.. 저요.. 저는 부끄럽게도 자주 저 자신을 속이고 부끄러워 한답니다. 저란 작품은 누구의 작품도 아닌.. 물론 형체는 부모님의 힘을 빌렸지만.. 그 이후의 작품은 저 자신의 몫입니다.. 자기 자신이 얼마나 아끼고 잘 다루어 가느냐에 따라서 사랑받을수 있는 작품으로 거듭날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 누구나 할수 있답니다. 실제로 그럴수 있는가가 문제입니다. 제가 처한상황, 하는일, 외모, 경제력 등등 한번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 부끄러워 한적이 없다면 아마도.. 사이보그가 아닐까합니다..  잠깐 내얘기 들어볼래..^^

내가 처한상황~~ 난 나이가 30중반인가.. 아직 결혼은 안했고.. 인원수로 보면 대기업이지만 매출로 보면 아직은 중견기업에 근무를 하고 있지.. 나름 내 성격은 자유방임주의라고 생각을 해.. 30초반에는 그냥 생각만으로 모든것을 행동으로 실천으로 옮겼어.. 실제로 그래서 미국내 오지라는 알라스카 에서 2년간 생활을 했고, 지금 솔직히 그 2년이 내 생애 마지막까지 잊혀지지 않을 시간이 될거야.. 만일 그 당시 생각만으로 멈추어 버리고 직장생활을 했다면 어찌되었을까.. 우린 이걸 If 심리학이라고 하지.. 근데 아마도 돈 얼마 더 벌었을테고.. 결혼을 했을수도 있겠고.. 지금에서까지 그때 가지 못한 알라스카를 그리워 하고있을수도 있겠지.. 뭐가 더 좋은 것일지는  각자의 판단이야.. 난 절대적으로 전자를 택하고 있어... 2년간의 나의 생활.. 30년간의 내 마인드와 생활을 바꾸기에 충분한 나날들이었어.. 알라스카의 겨울은 춥고.. 어두워... 그리고 겨울은 볼것도 없고.. 그러다보니 술들을 많이 먹지.. 알콜릭도 많이들 있고.. 그래서 난 2년간의  겨울은 활기찬곳으로 나아갔지.. 첫해 겨울은 캐나다 밴쿠버에서 지냈고.. 두번째 겨울은 라스베가스에서 지냈지..

누군가는 팔자좋은 소리라고 할수 있겠지.. 내 얘기 더 들어볼래 ?.. 나 떠날때가 직장생활 1년차 였어.. 통장에 보니.. 1,000만원 정도 있고.. 월급통장에 한 500 있던거 같아.. 1,000만원으로 정기예금에 넣어놓고.. 500만원만 들고 떠났어.. 비행기 값 그 당시 앵커리지 편도가 한 70만원이었는데.. 형이 내주었어.. 그리고 바로 학비를 내야하는데.. 그게 한 200만원 되었지.. 나 조금 지원받고 갔지.. 그러다 보니.. 남은돈 300만원.. 그 당시 환율이 거의 1:1 이었거든.. 그러니 한 3,000불 남은거야.. 갑자기 아는 사람 하나도 없는데 너무나 막막하더라고.. 무슨 배짱으로 이걸들고 여길 왔는지.. 당장 미국 땅이라는곳 그중에서도 이곳 앵커리지는 정말 차 없이는 못사는곳인데..

학교가는 첫날.. 아는사람도 없고.. 말도 안통해서.. 학교를 걸어서 갔어... 눈이 내리는 날이었지.. 지나가는 모든사람들이 날 쳐다보더라고..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눈길에 걷는 사람은 거지 아니면 원주민 밖에 없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학교 근처까지 가는데.. 한시간 걸리더라고.. 애써 도착했는데.. 캠퍼스가 두개라더군... 나는 제2캠퍼스로 온거고.. 제1캠퍼스까지는 차로 한 15분가야 한다고 하더라고.. 난 다시 걸어서 눈을 맞으면 걸었지..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셔틀버스가 5분에 한대씩 있었더라고.. 어쨋든 첫날부터 지각을 해서..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전공수업이라 그런지.. 학생이 10명정도 .. 교수를 포함해서 날 빤히 쳐다보더라고... 교수의 첫마디.. 아직도 기억에 생생해... 유 머스트 총~~ 내 이름이 Choong 인데.. 이걸 총이라고 발음을 하더라고.. 2시간 남짓을 걸어서.. 얼굴은 안면홍조증 걸린아이같지.. 옷은 눈에 많이 젓었지.. 지각했지.. 하여간 창피했어.. 거기다가 남은자리는 제일 앞자리 하나.. 그 3시간의 수업동안 난 뭘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어...단 하나 생각 나는거.. 집에 가고싶다..

한국가서 다시 일하고 싶다... 울고싶다.. 도망가고 싶다.. 암울하다.. 그렇게 내 알라스카 생활은 시작이 되었어.. 

그게 2005년 1월 초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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